진주가 자라는 집

진주가 자라는 집

0

Spam Kim

『진주가 자라는 집』 제1화 – 소리가 울리는 집 그 집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불길했다. 무진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십 분쯤 걸으면 나오는 슬레이트 지붕 집. 갯벌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뒤섞인 골목 끝, 시멘트 벽에 이끼가 낀 그 집은 마치 소리를 삼키는 구멍 같았다. 아이는 살아 있었고, 가족도 함께 지냈다. 밥 냄새는 났고, 빨래는 마당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보건교사가 두 달 넘게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무진초 보건교사 한서윤은 처음엔 그저 말이 없는 아이려니 했다. 내성적이거나, 낯가리거나, 혹은 집에서 무언가가 있는. 무진에선 흔한 일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고 해서 바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혀 아래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이건 병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3학년 2반 김하은. 담임 선생님의 의뢰로 보건실에 온 아이는 입술이 부르텄고, 눈 밑이 퍼렇게 들어 있었다. 몸무게는 또래보다 7킬로그램이나 적었다. 서윤이 체온계를 들이밀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다. "그래 괜찮아. 겨드랑이로 재도 돼." 그때 아이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침도 아니고, 이도 아닌. 뭔가 딱딱하고 하얀 것. 처음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대신 침이 흘렀고, 그 침은 이상하게 짙었다. 바닷물처럼 짠 냄새가 났다. 혀가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었고, 그 표면엔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하은아, 혀 좀 들어 올려볼래?"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아프지 않을 거야. 선생님이 그냥 한 번만 볼게." 서윤이 압설자로 조심스럽게 혀를 들어 올렸을 때, 그녀는 숨을 멈췄다. 혀 아래 점막에 뭔가가 박혀 있었다. 아니, 박힌 게 아니라 자라고 있었다. 하얗고 반투명한 조각. 조개껍데기처럼 생긴 물질. 빛에 비추면 아주 미세하게 무지갯빛이 돌았다. 진주였다.

Poster
Poster
Poster
Poster
Poster

완벽한 구형은 아니었지만, 분명 진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살과 붙어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서 자란 것처럼. "아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눈동자가 떨렸다. 말 대신,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것이 공포인지, 수치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었던 건 하나였다. —그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핀셋으로 진주를 건드려 보았다. 아이가 움찔했다. 진주는 단단했지만, 그 아래 연결된 부분은 살아 있는 조직처럼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핀셋이 닿는 순간, 아주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울림.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떨림에 가까웠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뼈로 느끼는 종류의 울림이었다. 무진은 침묵의 땅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고, 기억하지 않는 것이 배려였다. 이곳 사람들은 안개가 짙은 날엔 문을 닫고 집 안에만 머물렀다. 갯벌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확인하러 가지 않았다. 새벽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도 커튼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묻지 않았다. 보건교사로 부임한 지 반년, 서윤은 이상하게 말이 적어지는 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상담일지를 써야 할 때마다 손이 멈췄고, 증상을 적으려 할수록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치 무진의 안개가 머릿속까지 스며든 것처럼. 그래서 그녀는 글 대신 물건을 모으기 시작했다. 보건실 캐비닛 맨 아래 서랍. 잠금장치가 달린 그곳엔 이상한 수집품들이 쌓여 있었다. 아이들의 탈락된 이 - 평범한 유치가 아닌, 끝이 뾰족하거나 표면에 이상한 무늬가 있는 것들. 피 묻은 휴지 - 코피가 아닌, 귀나 눈에서 흐른 것들. 이상한 색의 타액 샘플 - 투명하지만 빛을 받으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들. 그리고 오늘은—진주. 서윤은 보존액이 담긴 유리병에 진주를 넣고 라벨을 붙였다. '2023.10.14. 김하은. 혀 아래.' 그 조각은 크지 않았다. 직경 5밀리미터 정도. 그런데도 책상 서랍을 닫고 나서도, 서윤은

Poster

계속 그 진주가 자기 등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유리병 속에서 진주는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코올 속에서도 죽지 않은 채. 마치 숨을 쉬듯이. 그 아이의 집은 무진 북쪽 끝자락, 갯벌과 도로 사이의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집이었다. 사람들은 그 집을 '소리가 울리는 집'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이름과는 달리 말소리가 벽을 타고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법이 없었다. 서윤이 가정방문을 갔을 때,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초인종은 고장 나 있었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분명 안에 사람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움직였고, 부엌에선 무언가 끓는 소리가 났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문을 연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얼굴이 축축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젖어 있었다. "학교에서 왔습니다. 하은이 건으로..."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윤을 거실로 안내했다. 곰팡이 냄새와 바다 냄새가 뒤섞인 집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고, 전등은 희미했다.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든 사진에서 입 부분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서윤이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애엄마는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못 나가는 게 아니라, 안 나가는 겁니다." "아… 네. 혹시 하은이가 요즘 말하기 힘들어하지 않나요?" "말하기 힘든게 아닙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오래 울었거나, 오래 침묵했거나. "안 하는 겁니다. 하면 안 되니까." 서윤이 학교 상담을 제안했을 때 그는 딱 한 마디만 했다. "그 애는 괜찮습니다. 말 빼곤요." 그리고 그 말은 서윤의 귓가에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치 그 '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듯이. 돌아오는 길, 서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2층 창문에서 누군가 커튼 사이로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다음날 늦은 오후, 보건실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Poster
Poster
Poster
Poster
Poster

익숙한 얼굴이었다. 무진약국의 약사, 경도. 검은 가운 대신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조용한 걸음걸이는 변함없었다. 손에는 작은 약봉투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 "네?" "그 아이... 혹시 입 안에 무언가 자라고 있진 않던가요?"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아이를 진찰한 것은 바로 얼마 전 이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경도는 그녀의 눈빛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밑엔 깊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잠을 못 잔 사람의 눈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의 눈이었다. "이번에도 진주인가 보군요." "...그게 뭔데요?" 경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무진의 해는 언제나 갯벌 너머로 붉게 저물었다. "...그런 걸 본 적이 있어요. 예전에." "…어떤 거요?" "말이 아니라… 다른 게 자라던 경우요." 경도는 조용히 약봉투를 책상 위에 두었다. 봉투가 축축했다. 안에서 바닷물 냄새가 났다. "이건 약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돌아섰다. 문을 나서기 전, 한 마디만 덧붙였다. "진주를 모으고 계신다면, 물에 담가두세요. 마르면... 소리가 납니다." 서윤이 약봉투를 열었을 때, 그 안엔 약이 아닌 하얀 조개껍데기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껍데기 안쪽엔 작은 진주가 박혀 있었다. 오래된 것 같았다. 표면이 닳아 있었고, 광택도 흐릿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처럼. 혹은 안개처럼. 밤 11시. 서윤은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책상에 놓인 유리병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일어나 앉았다. 창밖엔 안개가 끼어 있었다. 무진의 밤안개는 짙고 축축했다. 모든 소리를 먹어버리는 것 같은 안개였다. 그때 문 앞에서 소리가 났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였다. 밤이 되자, 집 앞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종이봉투. 그리고 그 안에 진주 하나. 진주는 아까 본 것보다 컸다. 그리고 더 맑았다.

Poster

안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서윤이 그것을 집어 들자, 손바닥에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맥박 같은 것이었다. 봉투 안엔 쪽지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아이의 글씨였다. 『이건... 엄마 거예요. 근데, 엄마는 말해서 사라졌어요.』 서윤은 그 진주를 손에 쥔 채 잠시 멈춰 섰다. 토해낸 건지, 넘긴 건지, 아니면 원래 그 아이 것이 아니었는지—단정할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 버려진 말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껍질을 두르고 둥글게 뭉쳐진 채. 서윤은 문을 닫고, 진주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말 대신 자라난 눈알 같았다. 말 대신, 바라보는 존재. 그리고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돌아가며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주는,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주가 자라는 집』 제2화 – 그 아이의 혀 아래 서윤은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욕실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낡은 원룸의 전기 배선은 습기에 약했고, 안개가 짙은 날이면 어김없이 말썽을 부렸다. 양치질을 하다 문득 느꼈다. 혀끝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처음엔 어제 먹은 김치찌개가 너무 짰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잇몸과 혀 사이, 어금니 근처 점막 안쪽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처일까. 입병일까. 칫솔을 내려놓고 입을 크게 벌렸다. 스마트폰을 켜서 입 안을 비췄다. 그녀는 혀를 들어 올려 거울로 비춰봤다. 거기, 아주 작고 매끄러운 것이 자라고 있었다. 크기는 쌀알만 했지만 분명했다. 하얗고 단단하고, 살갗 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그 존재감을 은근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표면은 진주 특유의 광택을 띠고 있었고, 형광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무지갯빛으로 일렁였다. 진주였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어둠 속에서도 입 안의 진주는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혀로 그것을 건드리자 단단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물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이게 뭐지... 설마 나도?" 그녀는 침을 삼켰다.

Poster
Poster
Poster

삼킬수록 진주가 그 움직임을 타고 으스스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과 함께 진주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몸 안 어딘가에 낯선 기관이 생긴 것처럼. 새로운 감각 기관이,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하은이와 같은 증상. 하지만 왜? 자신은 하은이의 가족도 아닌데. 아니, 잠깐. '엄마 거'라는 쪽지가 떠올랐다. 엄마는 말해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럼 이건... 유전? 가족 간 전염? 그녀는 침을 삼켰다. 삼킬수록 진주가 그 움직임을 타고 으스스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과 함께 진주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병은 아닌 것 같았다. 하은이 아버지도 '말 못하는 것 빼곤 괜찮다'고 했다. 그럼 이건... 말과 관련된 무언가? '소리가 울리는 집'인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 엄마가 말해서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 자신의 입 안에도... 막연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무진에 온 이후로 자신이 점점 과묵해졌다는 걸 떠올리니, 어쩐지 이 진주가 침묵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서윤은 서둘러 기록을 꺼냈다. 보건실 창고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철제 캐비닛 안에는 오래된 서류철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표지는 습기로 뒤틀려 있었고,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오래된 교무기록, 양호일지, 폐기된 보건파일들. 그중에는 20년 전 이 학교에서 근무한 보건교사의 메모도 있었다. 표지엔 '1993-1994 특이증례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잉크는 바래 있었고, 문장들은 띄어쓰기 없이 이어졌지만, 몇 줄은 선명했다. 『여아의 혀 아래서 조개껍질 조직 관찰 말 없음 수면 중 눈 뜸 한 마디도 하지 않음 치아 깨짐 진주 구조 추정 삼촌 장례 이후 증상 시작』 페이지 아래엔 아이의 낙서처럼 보이는 스케치도 있었다. 입을 열고 있는 아이. 그 안에서 뻗어나오는 나선형의 실선들. 실선은 혀에서 시작되어, 말풍선도 없고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감고 있었다. 서윤은 메모를 덮었다.

Poster
Poster
Poster
Poster
Poster

책상쪽을 보니 진주 하나가, 서랍 속에서 스스로 나와 있었다. 그것은 무생물 같지 않았다. 조직이었다. 누군가의 말의 잔해 같았다. 진주는 미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아니, 호흡처럼. 학교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 애가 소금을 먹는다. 급식 시간에 소금통을 들고 다닌다. 물을 안 마신다. 우유도, 주스도 거부한다. 급식에서 나오는 조개류를 숨긴다. 바지 주머니에, 책가방에, 책상 서랍에. 그러다 목격담이 늘어났다. 심지어 어떤 애는 그 아이의 입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고 말했다. 체육 시간에, 햇빛 아래서, 하은이가 하품을 할 때 봤다고. 이빨도 아니고 침도 아닌, 딱딱하고 하얀 무언가가 혀 아래서 빛났다고. 하지만 교실은 점점 조용해졌다. 하은이 주변의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반 전체가, 그리고 옆 반까지. 마치 침묵이 전염되는 것처럼. 서윤은 아이의 집을 다시 찾았다. 하굣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렸지만, 그 집 근처는 조용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묵묵부답. 다시 눌렀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이 보였다. 그 아이는 현관에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손에는 작은 그릇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낡은 놋그릇이었다. 그 안엔 조개껍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크고 작은 조개껍질들. 모두 속이 비어 있었고, 안쪽은 진주층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서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윤이 다가가려 하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마른 손. 그 손에는 조그만 진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살짝 끼워진 진주는 오후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자기 입을 가렸다. 그 진주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아니,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표면에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진동은 공기를 타고 서윤의 귀에 닿았다. 들리지 않는 주파수의

Poster
Poster

울림이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고 있었다. 아이가 진주를 내밀었다. 서윤이 받으려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놋그릇을 가리켰다. 진주를 그릇에 넣으라는 뜻이었다. 서윤이 진주를 그릇에 넣는 순간, 다른 조개껍질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명하듯이. 그리고 아이는 그릇을 서윤에게 건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윤은 계속 그릇 속을 들여다봤다. 진주는 조개껍질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그날 밤, 서윤은 또다시 진주를 만났다. 이번엔 자신의 책상 위였다. 언제 놓였는지 모를 유리컵 하나.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 안에 진주가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엔 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니 냄새가 났다. 짠내. 바다내음. 그리고 아주 희미한 곰팡이 냄새. 썩은 해초 같은, 오래된 항구 같은 냄새였다. 컵을 들어 빛에 비춰보니 액체는 완전히 투명하지 않았다. 미세한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소금 결정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입자들이었다. 컵 속의 진주는 말없이 돌고 있었다.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아주 천천히, 소용돌이치듯. 액체의 대류를 타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최면에 걸리는 것 같았다. 진주의 표면에 비친 빛이 나선을 그리며 돌았다. 그 나선은 점점 깊어져서, 마치 진주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 진주를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감촉만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 후— 소리가 났다. [……엄마가…… 말했어요…… 그래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했다. 물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먼 곳에서 오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진 것 같았다. 멈췄다가, 다시 반복됐다. 이번엔 다른 목소리였다. 더 낮고, 더 오래된 목소리. [……말하고 싶을수록…… 자라요……] 그녀는 손을 놓쳤고, 진주는 바닥에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

Poster
Poster
Poster
Poster

떨어졌지만 깨지지 않았다. 카펫 위에서 몇 번 튀었다가 멈췄다. 그리고 거기서, 바닥에 누운 채로, 아주 작게 떨렸다. 서윤은 무릎을 꿇고 진주를 바라봤다. 뭔가 달라 보였다. 더 투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더 흐려진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아직 말을 끝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더 많은 이야기가, 더 많은 목소리가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서윤은 떨어진 진주를 주워 들었다. 차가운 표면이 체온에 닿자 미세하게 떨렸다. '목소리가... 들렸어.' 진주 안에 목소리가 있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혹시 말이’ 서윤은 말을 꺼내다 말았다. 정신나간 생각이었기 때문에 과학을 배워 온 자신이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던 문득 그녀는 입 안의 쓴맛을 느꼈다. 혀끝이 무거웠다. 철분 맛이 났다. 아니, 바다 맛이었다. 혀로 입 안을 더듬었다. 아침보다 진주가 커진 것 같았다. 표면이 더 매끄러워졌고, 더 단단해졌다.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서윤은 거울을 보러 일어서려다 멈췄다. 바닥의 진주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녀의 입 안 진주와 공명하는 것 같았다. 같은 주파수로, 같은 리듬으로. 그들은 대화하고 있었다. 말이 아닌 방식으로. 『진주가 자라는 집』 제3화 – 물의 기원 그날 따라, 무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골목마다 물이 고여 있었다. 서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길은 말라 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후가 되자 도로 곳곳이 축축해졌고 틈새마다 물기가 퍼졌다. 배수구에선 물이 스스로 올라오는 것 처럼 퍼졌다. 검은 물이었다. 하수도 물처럼 탁했지만, 냄새는 달랐다. 축축한 공기 속에선 짠내가 났다. 마치 갯벌이 도심 위로 떠오른 것처럼. 무진 사람들은 그런 날을 '물이 오르는 날'이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신발을 조심스럽게 놓고, 현관문 틈을 신문지로 막았다. 학교는 방과 후였다.

Poster
Poster

아이들은 모두 돌아갔고,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습기 때문이었다. 이런 날이면 전기 설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보건실 안엔 한참 전부터 놓여 있던 유리컵 하나. 그 안의 진주가, 또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물도 없이, 공기 속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해류를 타고 있는 것처럼, 느리고 일정한 원을 그리며 떠돌았다. 서윤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진주는 컵의 벽면에 부딪칠 때마다 작은 소리를 냈다. 딱, 딱. 모스 부호 같은 리듬이었다.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한. 경도의 말이 떠올랐다. "물에 담가 두세요. 마르면... 소리가 납니다." 처음엔 은유려니 했다. 진주에서 말이 들렸었는데, 물이 침묵시키는 걸까. 유리컵 속 진주가 물 없이 떨리는 걸 보며, 그녀는 물이 진짜 어떤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무진에서 '물이 가만히 머무는 곳'은 거의 없었다. 빗물은 곧바로 갯벌로 스며들었고, 수도물조차 오래 고여 있으면 이상한 막이 생겼다. 사람들은 물을 받아두지 않았다. 욕조도, 물통도, 어항도 없었다. 마치 물을 가두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서윤은 갑자기 무언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충동이었다. 아니, 강박에 가까웠다. 진주가 물을 원한다는 확신. 물이 진주를 원한다는 예감. 책상 서랍에서 진주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고 밖으로 나갔다. 하은이가 준 진주도, 경도가 준 조개껍질 속 진주도 함께 챙겼다. 세 개의 진주가 봉지 안에서 부딪치며 희미한 소리를 냈다. 가는 곳은 옛 목욕탕이었다. 지금은 폐쇄된 학교 건물 뒤편, 사용되지 않는 낡은 실내 욕장. '해수탕'이라는 간판이 아직도 붙어 있었지만, 글자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10년 전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고 했고, 물이 저절로 넘친다고 했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오면 말을 잃었다고 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녹슨 자물쇠는 형태만 유지한 채 열려 있었다. 건물 안은 어두웠다. 창문은 모두 덧창으로 가려져 있었고, 형광등은 켜지지 않았다. 서윤은

Poster
Poster

스마트폰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타일 벽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검은 곰팡이가 아니라 하얀 곰팡이였다. 소금 결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금이 간 세면대, 깨진 거울, 떨어진 타일 조각들. 그리고 그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욕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아직도 물이 고여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물이 있었다. 증발하지도, 썩지도 않은 채로. 맑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누런빛을 띠고 있었고, 표면은 거미줄처럼 미세한 균열로 일렁였다. 기름막 같은 것이 떠 있었지만, 만지면 물처럼 흩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손전등을 비춰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서윤은 망설이다가, 비닐봉지를 풀고 진주를 꺼냈다. 하나씩, 조심스럽게. 첫 번째 진주를 물에 담갔다.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주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표면에 떠 있었다. 마치 물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하지만 몇 초 후, 변화가 시작됐다. 물 위로 거품이 일었다. 작고 끈적한 기포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진주 주변의 물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작은 회오리였다. 그 회오리는 점점 커져서, 욕조 전체로 퍼졌다. 진주에서 진동이 시작됐다. 그 진동이 물을 타고 퍼졌다. 파문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오는 울림이었다. 뼈를 타고 전해지는 종류의 진동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물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귀를 기울였다. 물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소리가 아니었다. 음절도 문장도 없었다. 다만, 어떤 감정이 진동처럼 퍼지고 있었다. 두려움, 그리움, 고통.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이 물 위에 퍼졌다가 사라졌다. 말이 되지 못 한 감정들은 층층이 가라앉은채 기억처럼 물속 깊은곳에 남아있었다 감정들은 말이 되지 못하고 가라앉은 기억처럼, 물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진주를 넣었다. 물의 색이 변했다. 누런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다의 색이었다. 짠내가 더 짙어졌다. 욕조는 이제 바다의 일부처럼 보였다. 깊고, 어둡고, 끝을 알 수 없는. 그때였다.

Poster
Poster
Poster
Poster

욕조의 수면 아래, 아주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도와줘요……] 그것은 분명한 음성이었다. 여자아이의 목소리. 하은이의 목소리였다.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지만, 분명 하은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더 오래되고 낮은 목소리.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목소리. 마치 바닷물 속에서 오랜 시간 침전된 말의 흔적처럼. [……진주를…… 돌려줘……] 서윤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벽 너머, 혹은 물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일 벽의 균열이 눈동자처럼 보였고, 천장의 얼룩이 입처럼 보였다. 욕조 안의 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 움직임이 마치 숨결 같았다. 들숨과 날숨. 수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살아 있는 것의 호흡이었다. 세 번째 진주를 넣으려다 멈췄다. 물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형체가 분명해졌다. 하얀 것이었다. 진주였다. 수십 개의 진주가 물 아래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물에서 진주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손바닥 위에서 진주들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표면에 변화가 있었다. 아주 작게, 미세한 소용돌이 무늬가 맺혀 있었다. 지문 같은 무늬였다. 아니,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나선형으로 배열된 작은 문자들이었다. 읽을 수 없는 문자.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는. 그리고 마치—누군가가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갇힌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서윤은 그날 이후로, 입 안의 진주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 안에서 바닷물 맛이 났다. 양치질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짠맛. 컵 속의 진주가 움직일 때마다 입 안의 진주도 함께 움직였다. 공명하듯이. 컵 속의 진주, 욕조 속의 진주, 그리고 입 안의 진주—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서로를 부르고, 반응하고, 같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같은 곳에 있었던 것일까. 같은 입에서 나온 것일까.

Poster
Poster

아니면 같은 물에서 자란 것일까. 며칠 후, 학교 복도에서 물자국을 발견했다. 처음엔 청소 아주머니가 대걸레질을 한 자국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발자국이었다. 작고 맨발의 자국. 누구의 발자국도 아닌데, 축축한 흔적이 바닥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3층 복도 끝에서 시작해서, 계단을 내려와, 2층 복도를 지나, 보건실 앞에서 사라졌다. 물자국은 점점 진해졌다. 보건실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물이 흘렀다. 그날 보건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서윤이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을 때,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바다 냄새가 났다. 안쪽 책상 위엔, 젖은 손자국 하나가 남아 있었다. 작은 손이었다. 아이의 손. 다섯 손가락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손자국 한가운데, 진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로운 진주였다. 더 크고, 더 맑았다. 안쪽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스스로 발광하는 진주. 서윤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차가웠다. 얼음처럼. 하지만 손에 닿는 순간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체온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맥박에 맞춰 박동하기 시작했다. 서윤은 그 손자국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제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입 안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그것이 자라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듣고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진은, 침묵의 틈을 통해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진주가 자라는 집』 제4화 – 누군가는 진주를 먹는다 그 아이가 처음 진주를 먹은 날, 서윤은 그걸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삼킨 후였다. 오후 세 시. 보건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발견한 것은 청소 아주머니였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고, 아이는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처음엔 잠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눈은 반쯤 떠 있었고 시선은 천장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윤이 달려왔을 때, 아이는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5학년 남자아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Poster
Poster
Poster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은 축축했다. 침이 아니었다. 더 끈적하고, 더 짠 액체였다. "얘야, 들려?" 대답이 없었다. 맥박은 정상이었고, 호흡도 규칙적이었다. 하지만 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윤이 아이의 어깨를 흔들자,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때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혀가 부풀어 있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표면은 매끄럽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질감에, 군데군데 하얀 반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조개껍질 깨지는 소리' 같은 것이 아주 작게 들려왔다. 딱. 딱딱. 마른 것이 부서지는 소리. 혹은 딱딱한 것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리듬이 있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지만, 살아 있는 것의 소리는 아니었다. 서윤은 아이를 깨워보려 했다. 볼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렀다. 아이는 눈을 떴다가 금세 다시 감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헤맸다. 무언가를 꾼 듯 떨고 있었고, 손은 배 위에서 천천히 오므라졌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을 당기는 것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옆 책상을 보니, 거기 뭔가가 놓여 있었다. 진주였다. 딱 하나. 하지만 그것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용된 것이었다. 서윤이 그동안 본 진주들과는 달랐다. 표면이 거칠었고, 광택도 흐렸다. 가장자리가 녹은 듯 흐물흐물했다. 뭔가가 안에서 빠져나간 자국처럼, 속이 텅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서윤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놀랄 정도였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구멍이 나 있었다. 작은 구멍. 뭔가가 뚫고 나온 흔적이었다. 서윤은 멍하니 그 구멍 난 진주를 바라봤다. 텅 빈 껍데기. 뭔가가 빠져나간 자국. '이게... 원래 안에 뭔가 있었던 거야?' 아이가 삼킨 후의 변화. 입 안에서 들리는 소리. 혀 아래서 꿈틀거리는 것. 마치 진주 안의 무언가가 아이 안으로 옮겨간 것처럼. 섬뜩한 상상이 스쳤다.

Poster
Poster
Poster
Poster
Poster

혹시 진주가 단순한 돌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걸 먹는다는 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멍한 눈동자와, 입 안에서 기묘한 소리들이 자꾸 생각났다. 먹는다는 것. 삼킨다는 것. 그건 단순히 넘기는 행위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가 풀려나고, 안쪽에서 열린 듯한 기분. 마치… 봉인이라도 깨진 것처럼. 말해지지 않은 어떤 감정이, 새어나오는 듯한. 그날 이후, 몇몇 아이들이 급식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명이었다. 입맛이 없다는 아이도 있었고, 목이 아프다는 아이도 있었다.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온갖 핑계를 댔다. 하지만 서윤이 보건실에서 확인했을 때, 아이들은 아픈 게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입 좀 벌려볼래?"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완강했다. 입을 벌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벌리게 하면, 온몸에 힘을 주고 저항했다. 그래도 몇몇은 검사할 수 있었다. 그들의 혀는 부풀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평소보다 두꺼웠다. 혀 밑 점막에는 조개껍데기 같은 희미한 껍질 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쌀알만 했고, 어떤 아이는 콩알만 했다. 놀라운 건—그 껍질은 물과 닿지 않았는데도 자라났다. 무진의 진주는 물속에서 자라는 줄 알았다. 갯벌에서, 바닷물에서, 축축한 곳에서. 하지만 아이들의 입속은 달랐다. 침이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됐다. 진주는 축축했다. 마르지 않았다. 혀 아래 어딘가에서 스스로 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말라야 할 점막이 오히려 더 젖어가고 있었다. 뭔가가 안에서…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급식실은 점점 조용해졌다. 떠드는 아이들이 줄었다. 밥을 남기는 아이들이 늘었다. 특히 국물 있는 음식을 거부했다. 물김치도, 된장국도, 우유도. "선생님, 저 물을 못 마시겠어요." "왜?" "그냥...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아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서윤은 창고로

Poster

쓰이던 옛 자료실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타닥타닥.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딱딱한 것이 딱딱한 것에 부딪치는 소리. 입천장에 혀가 닿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가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자료실은 본관 3층 끝,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다. 낡은 교과서와 교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문은 항상 잠겨 있어야 했는데,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조심히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아이 하나가 있었다. 혼자. 어둠 속에서.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희미한 빛이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것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진주였다. 아이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진주를 눈높이로 들어 올려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주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푸른빛과 흰빛이 섞인, 차가운 빛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입을 벌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턱이 내려가고, 입술이 벌어지고, 어둠 속에서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입 안으로, 진주를 넣었다. 서윤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 돼!" 아이는 흠칫 놀라며 뒤돌았다. 하지만 이미 삼키고 난 뒤였다. 목구멍이 꿀떡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한 번, 두 번. 뭔가 큰 것을 삼키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6학년 여자아이였다. 이름은... 김수진이었나. 창백한 얼굴에 땀이 흘렀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그걸 왜 먹었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났다. 뭔가가 걸린 것 같은,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은 소리. 대신 입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소리. -철컥철컥. 젖은 것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 서윤은 아이의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아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못했다. 이미 의식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혀 좀 들어봐." 아이가 혀를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Poster
Poster
Poster
Poster
Poster

아니, 정확히는 혀가 아닌 다른 것이 움직였다. 혀 아래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분홍색 점막 아래서 하얀 것이 움직였다. 처음엔 진주가 아직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혀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아래턱 안쪽에서 분리된 또 하나의 구조. 마치 두 번째 혀처럼, 원래 혀 아래에 숨어 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고, 매끄럽고, 진주 같은 광택을 띤 기관이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원래 혀와는 다른 리듬으로, 다른 방향으로. 입 안 깊은 곳에서 둥글게 말렸다가 다시 펴졌다. 서윤은 숨을 삼켰다. 그것은 혀가 아니었다. 혀의 기능을 하는 다른 무언가였다. 아이의 눈이 멍했다.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허공을 떠돌았다. 그리고 입 안에서 그 구조가—속삭였다. [……그 사람이…… 이제…… 저 안에서……] 그 소리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성대를 거치지 않은 소리였다. 입 안의 진주, 혹은 그 진주에서 자란 기관이 대신 '말하고' 있었다. 진동으로. 울림으로. 공기를 거치지 않고 직접 고막에 닿는 방식으로. 서윤은 아이를 보건실로 옮겼다. 의자에 앉혀놓고 물을 먹이려 했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물을 보자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부모에게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다. 전화는 계속 신호만 갔다. 대신, 그날 늦게 무진약국의 경도가 찾아왔다. 노크도 없이, 소리도 없이. 서윤이 돌아보니 그가 문가에 서 있었다. "벌써 먹은 아이가 나왔군요." 목소리에 놀람은 없었다. 예상했다는 듯한 어조였다. "…당신은 이걸 알고 있었던 거죠."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겠죠." 경도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에도 있었습니다. 진주를 먹는 아이. 그 아이는...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왜 먹는 거죠?" 경도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Poster
Poster

무진의 하늘은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배고파서요." "네?" "다른 종류의 배고픔이죠. 말에 대한 배고픔." "말... 이요?" "하지 못한 말들, 입밖으로 내지 못 한 감정 같은 것들요.” 경도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낡은 스케치북이었다. "이걸 보세요." 스케치북을 펼치자 그림이 나왔다. 아주 오래된 그림.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연필 선은 희미했다. 하지만 내용은 선명했다. 입 안에서 자라는 구조물. 하나의 혀가 두 개로 갈라지고, 그 중심에 진주가 박혀 있는 모습.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그림이었다. 의학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정밀함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인 작은 글씨. 『말은 사라져도 그 순간은 남는다. 진주 안에.』 "누가 그린 건가요?" "20년 전, 여기 있던 보건교사요. 그분도 결국..." 경도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대신 다음 장을 넘겼다. 더 많은 그림들이 있었다. 진주를 먹는 사람들. 입에서 빛이 나는 아이들. 두 개의 혀를 가진 여자. 그리고 마지막 그림은... 바다였다. 검은 바다. 그 안에서 떠오르는 수천 개의 진주들. 각각의 진주 안에는 얼굴이 있었다. 아주 작게, 희미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그날 밤, 보건실은 조용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든 것 같았지만, 가끔 입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하얀 것이 번뜩였다. 두 번째 혀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 속 진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동이었다. 아이의 입속 진주와 공명하는 진동. 같은 주파수, 같은 리듬.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서윤은 알아챘다. 누군가는 지금도 진주를 삼키고 있다. 학교 어딘가에서, 마을 어딘가에서. 진주는 새로운 기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대신할 무언가로.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방식의 소통 수단으로. 서윤의 입 안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그녀의 진주도 반응하고 있었다. 아침보다 커진 것 같았다. 혀로 건드릴 때마다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물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Poster
Poster
Poster

서윤은 컵 속의 진주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삼킨다'는 행위가 단순한 흡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말로 하지 못한 것들. 입 밖에 내지 못한 감정들. 그것들이 굳고, 둥글어지고, 마침내 형태를 갖췄을 때—진주가 되었다면.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되삼키고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말이자, 감정이었다. 흩어지지 않고 남은 것. 말하지 못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가 진주를 먹은 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섞이는 것일까? 어쩌면 무진의 모든 침묵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건 아닐까. 각자의 입 안에서 자라난 진주들이, 결국은 같은 바다에서 온 것처럼. 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 화장실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습기 때문이었다. 거울은 김이 서려 있었다. 손으로 닦아내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 입을 열었다. 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아주 천천히, 혀의 뒷면에서 돋아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하얀 돌기들이었다. 진주가 되기 전의 형태. 종유석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침샘 근처에서 시작해서, 혀 아래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삼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하지만 입 안의 진주가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로. [곧이에요. 곧 준비가 될 거예요.] 무엇이 준비되는 걸까. 서윤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무진의 침묵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방식의 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주를 통한 말. 물을 통한 기억. 침묵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것은, 멈출 수 없었다.

Poster
P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