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Star
By Kevin Shin
1화.
유일한 제국 엘리시아. 통일된 통치 아래 백년간의 평화가 꽃피웠던 이 땅에,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엘리시아의 심장, 셀레라니아. 번영의 상징이었던 이 도시는 하루아침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그날, 도시를 덮친 마력의 폭풍은 무자비했다. 거리는 비명소리로 가득 찼고, 사람들의 몸은 순식간에 흉측하게 변해갔다.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살점이 녹아내리는 동안, 건물들은 부식되어 무너져 내렸다. 한때 생명력 넘치던 도시는 이제 적막한 죽음의 땅이 되었다. 재앙은 셀레라니아에 그치지 않았다.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 넓은 땅을 불모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폐허 속에서 작은 미동이 일어나더니, '어떠한 존재'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앙의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살아남은 이들은 셀레라니아와 멀어져서 안전한 곳을 찾아 흩어졌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셀레라니아의 북쪽 룬가드를 지나 테인강을 따라 올라가면 험준한 산맥 깊숙이 자리 잡은 페일 마을은 재앙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중 하나였다. 사람 키 높이의 목책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워 보였지만, 주민들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어른들의 걱정과는 달리, 마을의 아이들은 여전히 천진난만했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세 명이 목책 아래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른들의 근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누가 더 멀리 가나' 하는 게임이었다.
어른들이 절대 하지 말라고 단단히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했을 이 게임은 간단했다. 산에서 최대한 멀리 내려가 떡갈나무 가지를 꽂아두고 오면 되는 것이다. 가장 멀리 간 아이가 대장이 되는 이 위험한 내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야논 아저씨가 그러는데, 내일은 비가 많이 올거래. 키리온이 이번에 도전할까?"
"그렇겠지만... 제이든의 기록을 넘으려면 너무 위험할거같은데."
옆에서 묵묵히 듣고있던 한 아이가 말했다.
"분명 가겠지. 가장 달리기가 빠른 키리온이 비도 오는데 안갈리가 없지."
"그렇겠군. 키리온이라면, 그성격에 안가면 오히려 더 답답해할 걸."
"마침 오고있네. 물어보자."
아이들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보자 짧은 금발머리에 또래보다 왜소해보이는 체격을 가진 아이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키리온이 간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듯 한 아이가 말했다.
"내일 비온다는데, 어디까지 갈꺼야? 네번째?"
"테인강을 넘어 다섯번째 구릉까지 갈꺼야! 대장이 바뀔 준비나 해둬."
자신감이 넘치는 키리온을 보며 아이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과 걱정스러운 표정이 함께 했다.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앞세워 한마디씩 거들었다.
"몇일전에 갔다가 돌아온 자경대원 아저씨 한명이 많이 아프다던데..."
"다른 자경대 아저씨는 아예 못돌아왔다고 들었어."
"어른들이 반대하는 건 다 이유가 있대."
아이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키리온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내 달리기 실력은 알지? 비가 많이오면 덜 위험하니까 멀리 갈 수 있어."
키리온은 제자리에서 점프를 두어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컨디션도 좋고, 내일 비도 오니 내일이면 대장이 바뀔 거야."
세 아이 중 중에 하나가 키리온에게 물었다.
"물론 알지. 그런데 너희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데 꼭 위험하게 도전해야겠어?"
"그건 별개의 문제야. 제이든의 덩치보다 내 심장이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해야 해."
"대단하다. 난 무서워서 못가겠는데."
"그러니까 내가 대장이 되서 너희들을 잘 이끌어주지."
키리온은 아이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목책을 쳐다보았다. 그의 작은 눈동자에는 호기심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곰같이 커다란 사내가 키리온을 맞이했다.
"늦었구나. 제이든은 벌써부터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네 아저씨."
제이든의 아버지인 에드릭에게 인사하고 나서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갔다. 키리온은 비록 피가 섞인 부모는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탁을 보니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곰처럼 큰 제이든이 반겼다.
"배고파죽겠다. 빨리 먹자."
저녁을 먹고 나서 제이든과 방으로 들어가자 키리온이 말했다.
"아버지 일은 잘 도와드렸어?"
"그럼. 아버지께서 내일 비온다고 하던데, 도전할꺼야?"
"당연하지."
"위험하지 않겠어? 나는 대장자리는 아무나 괜찮은데."
"금방 가서 꽂아놓고 올테니 푹 쉬고 있어."
키리온이 자신감있게 말하자 제이든이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아버지한테 들은 말인데, 자경대 누버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 말이야..."
"몸 안좋아서 쉬고계신다는?"
"오늘 아버지가 잠깐 보고왔는데, 한쪽 팔다리를 잘라내셨다고 하더라."
키리온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다.
"왜?"
"산 밑에 마력오염 때문에 자를 수 밖에 없었대."
"하지만 누버 아저씨는 룬가드 근처까지 가서 그렇게 된거잖아. 내일 비도 오니 더 괜찮을거야."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지. 네번째 구릉까지만 가. 나도 더이상 도전 안할게."
"대장패 뺏길까봐 두렵냐? 쫄기는."
“미친놈.”
그날 밤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키리온은 아침을 먹자마자 우비를 입고 목책 구멍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얼굴에 흐르는 빗물로 세수한번 하고는 다람쥐처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내 산 밑에 도착하자 세차게 내리는 비 사이로 첫번째 구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달려 두번째 구릉을 지나자 바닥에 풀들이 점점 없는 것이 느껴졌다. 세번째 구릉에 다다르자 누가 풀을 다 뽑아간 것 같은 흙과 그 위에 자신의 키의 반의 반만한 떡갈나무 가지 우뚝 서서 키리온을 반겼다.
"내가 곰같은 제이든보다 뛰어나다. 내가 최고지."
혼자말을 되뇌이고는 떡갈나무 가지를 뽑아들자 앞에 나와있던 길이의 두배나 되었다.
"비가 와서 다행이지 제이든 자식. 힘자랑을 이렇게 해놨군."
다시 세수를 한번 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테인강이 나왔다. 상류인 만큼 폭이 넓진 않았으나 비가 온 만큼 물살이 꽤나 불어 있었다.
"여기만 건너서 꽂으면 아무도 여긴 못오겠지?"
키리온은 작은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 도착했다. 잠시 후 네번째 구릉이 보일때쯤 건너기 전과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피부에 와닿았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그렇게 네번째 구릉에 올라가자 비 사이로 다섯번째 구릉이 눈앞에 보였다. 한번만 더 가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힘을 내서 갔다. 이젠 비가 와도 피부가 따끔따끔 해졌다. 결국 다섯번째 구릉 초입까지 뛰어가서 떡갈나무 가지를 깊게 꽂아두고는 왔던 길로 뛰어갔다. 다행히 비가 전보다 더 내려서 따끔거림은 사라졌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떴다.
“이제 내가 대장이야! 대장패는 나의 것!”
소리치며 이동한 키리온이 네번째 구릉에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비가 더 많이 온 만큼 작은 다리가 거의 물에 잠겼다가 모습을 드러냈다를 반복했다. 다리 앞까지 간 키리온은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리가 물에 잠겼다가 막 드러날 때 뛰기 시작했다. 타이밍은 좋았으나 다리가 무너질 것은 계산하지 못했다.
와르르!
곧바로 키리온은 비명과 함께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으악! 어푸푸."
키리온은 돌과 나무조각들이 물속에서 휘몰아치며 여기 저기 부딪치면서 죽을 것 같자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물 속과 물 밖을 넘나들며 시야를 확보하자 잡을만한 나무가지가 보였다.
'저걸 잡지 못하면 분명 죽을거야.'
결국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나뭇가지를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그순간 의문의 목소리가 머리속으로 들려왔다.
[그 손을 놔. 걱정하지마. 지켜줄게.]
귀에는 급류가 세차게 흐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잘못들었을거라 생각한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어.]
지금 이 나뭇가지를 손에서 놓는다면, 살 확률이 적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속에서 울리는 이상한 생각이 마력오염의 부작용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고있어.'
이상한 소리라 치부하고 급류에서 벗어나고자 나뭇가지를 몸으로 끌어당겼다.
[지켜줄게.]
다시 한번 머리속에서 들리는 순간 나무가지가 끊어지고 키리온도 실 잃은 연처럼 급류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시야를 확보해봐도 손으로 잡을만한 바위나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죽는건가...'
머리속에서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지내오던 제이든과 에드릭 아저씨, 엘로디 아주머니. 페일마을의 친구들. 기억에 없는 부모님을 생각해내려다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 돌바닥에 누워있는 자신과 온몸의 뼈와 근육이 비명지르는 걸 느꼈다. 누운 상태로 손발을 움직여보자 통증 이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으윽...여긴 어디지?"
주위는 어두컴컴했지만, 동굴 속인듯 말이 울리면서 메아리 쳤다. 깊숙한 곳에서 미약하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서서히 그 불빛을 따라 들어가자, 키리온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웅장한 석주들이 반원형으로 둘러싼 거대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커다란 수정 구슬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수정구슬에는 환상적인 푸른색 빛무리가 꿈틀대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생명체처럼 영혼이 깃든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누가 봐도 굉장한 것 같은데."
아픈것은 금새 잊고 키리온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석주들에는 미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수정구슬로 시선을 주면 그 글자들이 반짝였다.
'마법 진이라도 깔린 것일까?'
이 곳이 대체 무엇일까? 마법사의 던전? 아니면 고대 문명의 유적일까? 키리온은 황홀경에 싸여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때 정신을 잃기 전에 머리속에 울리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시간이 없어.]
"마력 오염의 후유증이려나... 좀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선물을 줄게. 가장 큰 기둥의 바닥을 봐바.]
키리온은 궁금증에 무심코 바닥을 바라보자 반투명한 광석 조각들이 잔뜩 흩어져 있는 것과 손가락 한마디만한 작은 구슬이 보였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보라색 작은 구슬과 광석 조각 4개를 주워서 주머니 속에 넣어서 꽉 동여매었다.
[마정석이야.]
마정석은 마나를 저장할 때 쓸 수 있도록 마나석을 가공된 보석 같은것이라고 야논 아저씨가 말해준 적이 있다. 그제서야 마력 오염의 부작용이 아니라 누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 바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말을 걸만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너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 왜 나한테 선물을 주는거야?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되?"
[시간이 없어. 선물을 주는 대신 내가 원하는걸 구해오면 더 좋은걸 줄거야.]
키리온은 선물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집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알았고, 나가는 길부터 알려줘."
[마정석에 마나를 가득 채워오면, 더 좋은 선물을 줄게.]
마법사도 아닌데 마나를 어떻게 채우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가는 길은?"
[여기 옆에 물 웅덩이 앞에 서봐.]
의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말하자 키리온도 재빠르게 물 웅덩이 앞에 섰다.
[물 속으로 들어가. 이제 내보내줄게. 마나를 꼭 채워와야해. 이제 진짜 시간이 없어.]
시키는 대로 물 속으로 들어가자 신기하게 얼굴 주변에 기포 같은 것이 생겼다. 숨쉬는데 지장이 전혀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다음에 보자.]